농협개혁, 지역농축협 역량 강화에 있었다”
농협개혁, 지역농축협 역량 강화에 있었다”
  • 김재민 기자
  • 승인 2015.07.06 0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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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훈 박사, 2단계 농협개혁 추진 중단은 유감

통합농협 출범 15년/ 특별대담 농협개혁전도사 김성훈 박사

농민·농촌·농업 미래 소비자의 선택이 유일한 희망
신경분리 보다 신경통합경영이 농민에게 더 유리

2000년 7월 1일은 대한민국 협동조합 사에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다. 농협, 축협, 인삼협을 하나로 합병한 통합농협이 출범한 해로 2015년 7월 1일은 통합농협 출범 15주년이 되는 의미있는 해이다.
본보는 지난 6월 22일자를 시작으로 총 3회에 걸쳐 ‘통합농협 출범 15주년’이라는 테마로 특집기사를 보도하고 있다.
이번호는 김성훈 장관과 대담을 통해 국민의 정부 시절 주요 농정개혁 과제에 대해 심도있는 대화 시간을 가졌으며 대담 내용 중 농협개혁 문제를 중심으로 일문일답 형식으로 풀어 보도한다.

만난사람 : 김재민 국장(본지 편집국장)
사진․정리 : 김민경 기자
시 간 : 2015년 6월 19일 금요일 14:00~16:30
만난 곳 : 강남구 청담동 김성훈 박사 자택

— 최근까지 강단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셨던 것으로 알고 있다. 최근 근황을 독자들에게 알려 달라.
▲농림부 장관 퇴임 이후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정년을 맞아 은퇴 후 명예교수로 활동했다. 지금은 문제가 많지만 상지대 총장으로 부임해 대학개혁에도 힘썼고 강의는 지난해 중앙대학교 경제학과 대학원에서 ‘경제사상사’라는 과목을 마지막으로 강단에서의 활동을 마쳤다.

요즘은 옥상정원에서 채소류를 재배하며 도시농업에 푹 빠져 있다.

— 1998년 국민의 정부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많은 개혁과제를 추진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수리조합과 농업진흥공사 등을 통합한 농업기반공사 출범, 수세폐지, 농협개혁, 친환경농업 원년 선포와 정책기반 조성 등 수많은 난제들을 임기 동안 해결하고 개혁을 마무리 지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재임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개혁과제는 어떤 것이 있는가.
▲어렵지 않은 개혁과제가 어디 있겠는가? 다만 당시 15여 만 명의 임직원과 농림공직자 그리고 수백만 농가와 소비자의 이해가 걸린 농민 관련기관 특히 농, 축, 인삼협중앙회의 통합개혁이 그 중 가장 힘들었다.

—여러 개혁과제 중에도 농협개혁을 가장 어렵고 힘든 과제로 꼽으셨다. 기자의 기억에도 이해 당사자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던 것으로 알고 있다. 협동조합 개혁 추진 이유와 또 추진 과정 등을 설명해 달라.
▲생각해 보시라. 세계 어느 나라가 농민 10명당 1명 꼴로 월급 받는 공직자와 임직원을 중복하여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있는가. 그중에서 대표적인 곳이 3개의 물 관리기관(농조, 농조련, 농업진흥공사)과 초거대 농, 축, 인삼협 중앙기구의 중복성이다.

그래서 위 두 조직의 최상부 구조를 통합해 그 절약분으로 대농민 하부구조를 강화하고 혜택을 농업인에게 돌리는 것을 목표로 농협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농민들에게 큰 부담이 됐던 수세(水稅)를 폐지하고 초고도 대출금리를 낮추는 것이 당시의 당면과제였다. 그 결과 동학농민 혁명의 원인을 제공했던 수세가 이 땅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됐고, IMF 체제하의 초고금리도 대폭 인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잡음이 크지 않았던 농업기반공사 출범과 달리 3개 협동조합 중앙회 통합은 의도했던 중앙조직의 슬림화보다는 오히려 중앙지족이 비대해졌다며 개혁실패론 또는 잘못된 개혁방향이었다는 지적이 계속 일고 있다.
▲그렇습니다. 원래의 개혁 청사진은 2단계로 나누어졌다. 첫 단계는 농․축협 병폐의 근원지에 해당하는 중앙회를 축소 통합하는 것이었고, 2단계 개혁으로 단위 농․축협의 조직, 업무, 서비스 내용의 대폭적인 효율화 대책이었다.

중앙회의 개혁 즉 통합 과정 중 개혁 대상들이 쏟은 출혈적인 에너지가 워낙 크다보니 피로증 때문에 주무장관의 사퇴로 이어졌고, 실질적 개혁이요 농협개혁의 효과로 나타나야할 제2단계 후속 개혁조치가 매듭지지 못한 것이 유감이다. 2단계 개혁 조치가 차질 없이 진행됐다면 구호만 난무하고 있는 판매농협이니 유통활성화이 하는 문제는 상당부분 해소됐을 것이다.

—2단계 농협 개혁이 중단되면서 이후 신경분리 문제가 쟁점화 됐고, 이명박 정부 들어 농협중앙회를 교육지원부문인 농협중앙회, 사업을 담당하는 농협경제지주, 신용사업부문인 농협금융지주 등으로 사업구조를 바꾸는 개혁이 추진됐다. 1기 협동조합 개혁을 추진했던 당사자로서 신경분리 조치에 대해 평가해 달라.
▲제1기 개혁 때(1998-2000)는 신경분리 문제에 대해 개혁반대 세력인 축협중앙회가 통합의 대안으로 제기했던 것이다. 정부와 농민단체 주체들은 그 저의를 간파하고 오히려 반대했었다.

왜냐하면 그 이전부터 금융권과 정부 일각에서 독자적인 협동조합 금융체제를 못 마땅이 여겨 일반 국가금융체제로 편입하려고 꾀하는 움직임이 집요하게 추진돼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통합 10년이 자나자 통합 농협의 후속개혁조치가 유야무야 시들해지자 역설적으로 전농, 한농연 등 농민단체들이 앞장서 신경분리를 개혁 기치로 내세우고 나섰다.

신경분리가 안됐기 때문에 유통경제 개혁이 안되고 있다고 본 것인데, 결과는 “소경이 제 닭 잡아먹는” 꼴이 되었다. 호시탐탐 신경분리를 꾀해 오던 신자유주의 금융세력들만 어부지리를 취하게 됐기 때문이다.

—다시 시계를 15년 전으로 돌려보자 2000년 통합농협 출범 당시 2단계 농협개혁 추진 방향 등을 대통령께 보고하신 것으로 알고 있다. 장관께서 구상했던 2단계 농협개혁과 현재의 신경분리이 차이점 그리고 향후 농협의 개혁방향에 대한 의견을 부탁드린다.
▲2000년 7월1일 현 농협대강당에서 김대중 대통령님 내외를 모시고 통합농협 출범식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농림부장관은 공개적으로 제2단계 구체적인 농협개혁 청사진을 비장한 각오로 발표 겸해 보고했다.

앞으로 농민조합원에게 실익을 가져다주는 일선 농축인삼협의 개혁방안으로 신경분리 대신에 독자적인 신경통합 운영에 따른 이익을 100% 농민들에게 환원하는 방안과 더불어 일선 조직의 통폐합 개혁방안이 포함됐었다. 그리고 나는 신병치료차 사임했는데 몇 년이 지나도 전혀 후속개혁조치들이 추진되지 못했다. 아마도 맨 정신을 가진 관료라면 미쳤다고 개혁에 손대느냐는 것이 당시 관가의 분위기였다는 후문이다.

대내외적으로 어려워질 대로 어려워진 우리나라 농업‧농촌‧농민‧농가 경제의 현 상황을 타결하는 열쇠는 그럼에도 여전히 농협을 제대로 개혁해 제자리에 갖다 놓고 제 역할을 하도록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다. 지금의 중앙회와 일선의 지도체제가 개혁돼야 한다.

—장관님 퇴임 이후 우리 농업은 FTA추진으로 인한 추가 개방 등으로 어려움에 빠져 있고 그 결과 새로운 농업 인력의 유입이 중단되면서 고령화로 성장동력을 상실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우리 농업 농촌을 위해 현 단계에서 가장 필요한 정책은 어떤 것이 있는지 소개해 달라.
▲이제 정부정책이라든지 정치권은 농민들에겐 더 이상 믿을 존재가 못된다. 농민인구도 또 개방에 따른 농업의 역할도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농업과 농민이 살길은 소비자를 우군으로 확보하는 정책방향만 남아 있다. 밥상 안전, 먹거리 안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소비자와 대중을 감동시켜 농업‧농민‧농촌을 살리는 정책개발에 전념해야한다.

농민(단체)들이 앞장서고 정부가 도와주는 방식으로 예컨대, 지금의 메르스 정국에서 소비자의 건강과 안전, 면역력 증강을 위한 유기농 친환경 식품 생산, 개발, 유통 등 소비자와 연계시키는 식품 안전 지원정책이 긴요하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장관 재임시절 김영삼 정부 막판 터진 외환위기로 매우 어려웠던 시절이다. 당시 우리 농업 지형을 바꾸는 사건 사고도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당시 정부는 우리 유전자원을 외국에 팔아먹었다는 오명을 쓰고 있기도 하다. 외환 위기 당시의 농정 상황과 극복과정 등을 설명해 주시는 것으로 이번 인터뷰를 마치려 한다.
▲IMF 환란이 터진 것이 1997년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것이 1998년 2월25일, 저는 3월3일 임명장을 받았는데 그때 이미 정부와 은행, 기업들이 부도내지는 파산이 나 있었다.

이미 짜여졌던 정부예산도 긴급조치로 무조건 15%씩 감축했고 공무원 월급도 일제히 깎여나갔다. 이런 와중에 채소종자로 크게 성공을 한 H, J 등 대형 채소종자회사들이 외국계 다국적기업에 넘어갔는데, 그 때 모회사 사장이 농림부에 손을 대어 200억원의 지원을 요청했었다.

그런데 그 종자 종묘회사는 부인, 아들, 딸, 며느리 등 가족이름으로 강남에 19개나 되는 빌딩을 가지고 있었고, 종자종묘사업으로 떼돈을 벌어 이미 자산을 빼돌려 놓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정부는 부도가 나 있었고 농안기금은 빈 깡통으로 바닥이 나 있었다.

다행히 식량종자만은 일찍부터 정부가 쥐고 있어서 괜찮았다. 그런데 중요한 채소종자 특허는 대부분 회사이름으로 보다는 개인 연구자의 특허로 나 있어서 개인 연구자가 팔아넘기기 전에는 영원히 우리나라 것으로 남아 있게 됐다. 회사 이름으로 돼 있는 일부 특허 종자도 이미 농우바이오 등 토종 국내기업들이 인수해 가기도 했다.

그래서 H, J 등 대형 종묘회사를 인수한 다국적기업도 별로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해 주인이 계속 넘어가서 지금은 다시 한국기업이 주인이 돼 있다. 이후 우리 채소종자산업은 개인 육종가들이 성과를 내기 시작했고 작지만 노력해온 민족 씨앗회사들 그리고 농촌진흥청 등을 중심으로 우리 종자 육종에 힘을 낸 수많은 연구자들의 노력과 애국심이 지난 15년간 다시 종자주권을 회복하는데 기여했고, 우리 농민들도 큰 불편함 없이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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