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농촌, 세월의 지혜(智慧)와 혜안(慧眼)을 펴내다
농업·농촌, 세월의 지혜(智慧)와 혜안(慧眼)을 펴내다
  • 박현욱 기자
  • 승인 2016.03.07 13: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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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신간 소개-천쌍의 農心]

청호 박원섭 씨 ‘천 쌍의 농심’ 3년간 집필한 자서전 출간
32년간 1080쌍 백년가약 맺어줘 다문화가정도 ‘32쌍’ 결실  

▲ 천쌍의 농심 표지 모습.
과거 농촌에서 나이는 권력이었다. 농부의 주름은 지혜의 상징이자 혜안의 증표였다. 논두렁에서 몸으로 체득한 삶은 나무의 나이테처럼 농민의 손끝에 오롯이 배겼다. 정보가 한없이 부족한 시대, 경험은 곧 경외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시대가 변했다. 정보가 넘쳐난다. 지식으로 무장한 젊은이들의 머리가 굵어졌다. 오히려 정보 취약계층은 경험은 많지만 삶의 변화에 무뎌져 간 이들이 독차지하게 됐다. 이른바 지식 소외 계층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이를 먹어감’은 ‘답답한 꼰대’로 변질됐고 수많은 삶의 굴곡을 이겨낸 이마의 주름은 뒷방 늙은이의 낙인이 돼 버렸다.

지혜는 변하지 않는다. 나이가 지혜의 증표가 되진 않지만, 지혜는 경험과 세월의 자양분을 먹고 자란다. 그만큼 경험은 중요하다. 옛 선인들이 선배들의 고견을 듣는 이치도 매한가지일 터. 머리만 꽉 찬 젊은이라면 지식을 찾아 헤매지만 머리도 꽉 찬 젊은이라면 먼저 세월에서 지혜를 찾는다.

70세를 이르는 한자어 종심(從心). 논어에서는 70세를 ‘뜻대로 행해도 도에 어긋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지식인들이 선배들의 삶의 지도를 더듬는 것도 이 같은 이치를 통달해서다.

10년을 더 살았다. 80세인 산수(傘壽)에서야 삶의 깊이를 알아간다는 청호(淸湖) 박원섭 씨가 자신의 자서전을 펴냈다. 1991년 충청북도 청주시 농촌지도소장을 역임한 그의 생생한 농촌 일대기를 책으로 묶었다. 항상 농업현장을 누볐던 그의 일생은 한평생 농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데 힘써왔다. 

세월을 무색케 하는 농업에 대한 혜안

▲ 박원섭 씨
그가 농업에 발을 들인 1961년은 지독한 가난으로 몸서리치던 시절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했던 그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농촌지도소를 방문해 박원섭 농촌지도원의 설명을 경청할 정도로 먹을거리는 온 국민의 관심사였다. 이후 전국에서 불같이 일던 ‘새마을운동’, ‘백색혁명’은 우리의 삶의 걱정거리에 ‘식(食)’을 저만치 떨어뜨릴 수 있었다.

그가 1974년 한 매체에 기고한 ‘새마을 운동이 안겨다 준 교훈’에서는 농민이 잘사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 엿보인다. 지금도 풀리지 않는 농가소득 제고를 글로 풀어낸 것이다.

그의 글에는 몇몇 키워드가 있다. ‘복지사회’, ‘농외소득 증대’, ‘농촌소득구조 개선’ 등 고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농촌의 겉모습은 변하고 있지만 농민들의 삶 언저리에는 아직 가난으로 얼룩져서다. 그의 자서전에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켜켜이 배어있다.

그의 농업에 대한 혜안은 지금도 주목할 만하다. 인생과 맞바꾼 농촌사랑에 대한 발자취를 더듬어보면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그가 1995년 6월 23일 청주시 농촌지도소 강당에서 농촌지도소장을 퇴임하는 그날의 퇴임사는 농촌의 민낯과 농업의 미래에 대한 성찰이 담겨있다.

“우리나라 농업과 농민도 변해야 하고 정부도 대폭적으로 농정의 비중을 높여야 합니다. WTO 출범도 문제려니와 21세기를 내다보는 새로운 물결은 생명공학의 이용으로 무공해 농산물 대량생산체계로 전환하고 첨단기술이 (식량)증산을 좌우할 것입니다. 소비자의 선택기회가 확대됨에 따라 시장 주도권이 생산자로부터 소비자로 넘어가는 이 마당에 시장원리에 따라 저장기술과 수송수단의 체계적인 확대가 필요합니다. 유통정보의 혁신만이 농업의 앞날을 열고 나갈 것이기에 환경농업의 중요성은 더 커가고 있습니다.” (천 쌍의 농심 162p 중)

각종 FTA와 TPP, 쌀시장 개방으로 허덕이고 있는 지금의 농업 현실은 농업계가 풀어야 할 숙제다. 그 당시에도 새로운 물결에 대한 위기감은 팽배했다. 하지만 당시 농민들은 똘똘 뭉치며 자생해 왔다. 또한 생명공학의 발달과 소비자 중심의 농업유통 변화도 20년 전에도 그의 눈에는 극복해야할 문제로 비쳤다. 그의 퇴임사는 지금의 농업이 풀어야 할 숙제에 대한 답을 내놓고 있다.

농심을 이어준 행복···주례만 천 번

다문화 가정을 이어준 것만 해도 32번. 32년간 1080쌍의 신랑신부의 주례에 나선 것이다.  박 씨는 이를 두고 자서전에서 농심을 이어준 행복이라 표현했다. 지역어른 역할을 톡톡히 한 셈. 당시 언론에서는 퇴직 공무원이 젊은이 1000쌍을 이어줬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좋은 일에 공덕 하나 제대로 못 해보고 오늘을 살고 보니 지나온 세월이 부끄럽다”고 회고하며 “그래도 농심을 알게 해주고 인정을 나눠주며 젊은이에게 백년가약을 맺어준 사랑의 보람은 다소나마 나 자신의 위안으로 여겨진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농촌 젊은이들을 농업의 신성장동력으로 여긴다. 그들의 행복을 기원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농촌의 젊은 피 수혈을 외치는 것도 ‘그들이 행복함’에서 출발한다는 믿음 때문이다. 그는 수첩에 그가 맺어준 인연들을 빼곡히 써내려가고 있다.

농업에 대한 사랑은 농촌의 외진 곳을 바라보면서다. 그가 1990년 7월 25일에 본지에 기고한 ‘어려운 농촌에 따뜻한 손길’이라는 글에서도 출향민과 사회단체들에 농촌 돕기를 권하고 고향친지에 생활용품 지원을 독려한 것도 농촌의 피폐함을 극복해보자는 취지다. 당시 그는 충북 농촌진흥원 사회지도과장을 역임하고 있었다.

그는 남은 인생을 3모작이라 표현한다. 이제야 2모작을 마쳤다는 그다. 헐벗은 이에게 옷을 주고, 깊은 물에 다리를 놓는 공덕을 쌓는 것처럼 남은 생을 덕을 쌓는 생활로 점철시키겠다고 밝혔다. ‘천 쌍의 농심(農心)’. 경륜과 성찰이 녹아있는 그의 한평생 일대기가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농촌에도 좋은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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