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 17년 노력의 결실 풀뿌리 입법 달성한 축산자조금법
[HISTORY] 17년 노력의 결실 풀뿌리 입법 달성한 축산자조금법
  • 박현욱·엄지은 기자
  • 승인 2020.08.21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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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적 절차 농가의 염원 담아낸 축산자조금

지속 가능한 산업 발전 마중물 역할
축산물 이미지 제고 혁혁한 공 세워


[농축유통신문 박현욱·엄지은 기자] 

1990년 4월, ‘농어촌발전특별조치법(농발법)’ 제13조에 임의자조금제도를 실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됐다. 이미 1970년대부터 양돈과 양계업계에서 자조금사업과 유사한 소비홍보사업을 벌여 왔던 두 단체는 이법에 따라 사업을 수행해 왔지만 농가의 참여 저조로 성과를 거두기 힘들었다. 

농가 스스로 돈을 모아 공동의 이익을 창출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사업 초기 무임승차 문제가 불거졌고, 자조금과 관련한 농가와 협회의 교육은 실효를 거두기 힘들었다. WTO 체제가 들어서자 축산물 개방이라는 위협에 시달렸던 축산업계는 자조금제도의 절실함을 깨닫고 축산자조금 입법을 서두르면서 자조금은 ‘반드시 성공해야 하는 제도’로 부각된다. 

하지만 당시 정부는 축산자조금 설립에 난색을 표했다. 법무부와 법제처가 헌법상의 재산권, 계약체결, 조세법률주의 등 위헌 소지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모든 축산 관련단체는 머리를 맞대 한국 농업민주주의를 실현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2000년 8월 한우, 낙농육우, 양돈, 양계산업의 축산업자조금법의 위헌여부를 법률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밀어 부친다. 

축산관련 지역구 국회의원 설득을 종용해 국회에 의원입법을 청원하게 되면서 2002년 5월 13일 ‘축산물소비촉진등에관한법률’이 제정된다. 축산업계가 발의해 행정부를 거쳐 입법부가 법제화하기까지 짧게는 10년 길게는 17년에 걸친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후 이 법률은 2006년 12월 28일 ‘축산자조금의 조성 및 운용에 관한 법률’로 바뀌면서 축산자조금 운영의 법적 근거가 되고 있다.
 

순조로운 시작···자조금 롤모델 된 우유자조금

낙농자조금(현 우유자조금)은 이미 소비홍보사업을 벌여온 한돈협회와 양계협회의 자조금 사업 참여 저조와는 달리 순조롭게 진행됐다. 낙농가들의 치열한 숙의 과정 속에 탄생한 낙농임의자조금 사업은 자조금사업에 롤모델로 인정받을 정도로 훌륭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1998년 낙농자조금을 추진하기 위해 대위원회가 개최됐다. (사진제공=우유자조금관리위원회)
1998년 낙농자조금을 추진하기 위해 대위원회가 개최됐다. (사진제공=우유자조금관리위원회)

1999년 출범해 시작부터 높은 자조금 거출률을 보였던 낙농은 타 단체의 부러움을 샀다. 자조금의 산파 역할을 했던 고 박영인 박사는 본지와의 과거 인터뷰에서 낙농부분의 성공 포인트를 유업체로 꼽는다. 당시 낙농가들은 유대 공제에 익숙해 있어 임의자조금임에도 불구하고 유업체의 유대 정산 시 자연스럽게 자조금을 공제해 높은 자조금 거출률을 기록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양계와 한돈의 경우 당시 자조금 거출 창구인 도축장의 비협조로 성공을 거두기 힘든 것과 비견되는 대목이다. 

이후 낙농자조금은 든든한 자조금 예산을 무기로 각종 교육사업과 TV광고 등을 진행하며 자조금의 진면목을 보여줬다. 낙농자조금의 성공은 축산인들에게 의무자조금 입법의 불을 지폈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무임승차 등에 대한 반대에 부딪히긴 했지만 우유소비홍보를 위한 TV 공익캠페인 광고를 최초로 도입하고, 북한어린이나 불우이웃을 돕는 ‘사랑의 우유 보내기 운동’ 등 다양한 형태의 사업을 벌여나갔다. 

또 학교우유급식의 실태, 우유 소비증진 등을 위한 연구사업을 실시하며 우유소비홍보와 안티우유 대응을 펼쳐나가면서 낙농가들의 공감대를 이끌어 2006년 5월 1일 첫 의무자조금을 거출을 시작으로 낙농가들의 오랜 숙원인 ‘의무낙농자조금시대’를 열었다. 
 

우유자조금 대표 사업인 도심 속 목장 행사 전경. (사진제공=우유자조금)
우유자조금 대표 사업인 도심 속 목장 행사 전경. (사진제공=우유자조금)

2014년 낙농자조금은 소비자들에게 더욱 친숙하게 다가가고자 '우유자조금관리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소비자와의 스킨십을 넓혀 나갔다.  간판을 바꿔단 우유자조금은 2015년 연초부터 연말까지 안티우유 보도 대응에 분주했다. 신문과 방송, 광고 등을 상시 모니터링하면서 잘못된 내용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반박해 바로잡고, ‘우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대응’ 사업을 신설해 우유에 관한 오해를 해소하고 안티여론 등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한편, 우유자조금은 해외 시장으로 소비처를 확대하기 위해 2013년 ‘해외 수출을 위한 공동 마케팅 사업’을 신설하는 등 유제품의 수출을 위한 공동 마케팅을 실시했다. 특히 이 사업은 우유자조금관리위원회와 한국유가공협회가 함께해 우유자조금사업에 유업계의 동참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또한 2013년 중국 상해를 시작으로 2015년 베트남 호치민에서 열린 ‘베트남 국제식품 박람회(Food&Hotel Vietnam2015)’에 참석해 한국의 다양한 유제품 브랜드를 홍보하는 한편, 깨끗하고 안전한 한국산 우유를 널리 알리고 있다.


임의자조금 타산지석 의무자조금 이끈 한돈자조금

임의자조금은 낙농업계가 모범을 보였지만 의무자조금법이 달성되기까지 양돈업계의 공이 컸다. 당시 양돈업계는 대일 수출이나 소비 홍보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며 몸집을 키운 결과, 유능한 인재 배출이 빨랐다. 특히 산업 선봉에 섰던 양돈 지도자들은 새로운 제도 도입에 적극적일 정도로 역량을 키워, 의무자조금 도입 대정부 활동에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한돈협회는 협회를 중심으로 갖은 회의와 전문가 집단의 자문을 받으며 농가 교육을 꾸준히 실천하고 있었고, 당시 농림부와 국회와도 지속적인 네트워크를 유지했다. 양돈업계가 의무자조금을 지향하는 열의는 임의자조금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뜨겁게 불타올랐다. 양돈은 의무자조금 도입을 협회의 주요 사업으로 진행해 온 경험을 토대로 축산 모든 품목의 의무자조금법을 공동 발의할 것을 모색한다.

2000년 국회에 ‘축산자조금법제정에관한청원’ 제출을 시작으로 2001년 축산업자조금법 제정에 관한 공청회 개최, 2002년 축산업자조금법 입법 단체장 및 실무자 회합, 2002년 축산자조금법 입법을 위한 최종 공청회를 끝으로 급박한 시간표를 소화하면서 그토록 염원하던 축산자조금법을 관철시킨다.

2005년 양돈 농가들의 투표에 의해 자조금사업 총회 구성원인 대의원을 선출했고, 관리위원 선출을 투표에 의해 결정하면서 전국의 양돈 농가들은 자조금 거출에 참여하게 된다. 양돈업계를 시작으로 한우·낙농 등이 잇따라 의무자조금 시행에 들어가면서 자조금계의 빅3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후 양돈자조금은 한돈자조금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래의 운영 취지에 맞게 소비촉진 활동에도 역량을 집중한다. 최근에는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를 비롯한 10개 소비자단체와 함께 ‘한돈 스마트 소비 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삼겹살 등 선호부위 외에도 가격이 싸고 영양학적으로 우수한 저지방 부위를 ‘스마트’하게 소비하자는 내용으로 시식회, 다이어트 클래스를 비롯한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하고 한돈 저지방 부위를 최대 58% 할인 판매해 소비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은 바 있다.  
 

한돈과 함께하는 다이어트 체험단 모습.
한돈과 함께하는 다이어트 체험단 모습.

특히 유명 헬스 트레이너를 홍보대사로 선발해 트레이너 대상의 간담회나 일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한 다이어트 체험단 등은 현재까지도 한돈자조금의 대표적인 사업 활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한돈나눔행사’를 통해 돼지고기 소비촉진의 계기를 마련하고 한돈인들의 사랑을 나누고 있다.


"소까지 잡았다" 3개월에 걸친 드라마···한우자조금 설립

자조금법이 통과됐지만 자조금 설립은 쉽지 않았다. 자조금법인 ‘축산물소비촉진에관한법률’에 따라 사육 농가 절반 이상이 자조금 도입을 찬성하거나 사육마릿수의 3분의 2이상을 사육하는 농가가 찬성해야만 대의원을 구성할 수 있는 여건이 충족됐기 때문이다. 특히 한우의 경우 당시 한우 사육농가는 16만 7,000 농가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다. 어느 누구도 한우업계가 한우자조금 설립의 성공을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2004년 한우자조금설치를 위한 대의원 투표에서 한우농가들이 투표를 마치고 남호경 전 회장과 이상수 당시 농식품부 축산경영과장과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전국한우협회)
2004년 한우자조금설치를 위한 대의원 투표에서 한우농가들이 투표를 마치고 남호경 전 회장과 이상수 당시 농식품부 축산경영과장과 악수를 하고 있는 모습. (사진제공=전국한우협회)

한우업계는 대군 농가를 중심으로 하는 사육마릿수 충족 전략을 구사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전업농가를 중심으로 투표에 참여시켰다. 첫 한우자조금 대의원 선거는 2004년 8월 말 경남·울산·부산 지역을 시작으로 장장 3개월에 걸친 한우자조금활동 대의원회가 잇따라 개최됐다. 남호경 전 한우협회장에 따르면 각 지역의 한우지도자들이 읍·면을 돌며 일일이 차량에 태워 투표장으로 실어 나르는 일은 다반사였고, 열기를 띄우기 위해 소까지 대접하며 투표인들을 독려했다고 말한다.

8월말부터 시작된 선거는 같은 해 11월 11일까지 수개월에 걸친 릴레이 투표의 대장정을 마치고 드디어 한우자조금 설립을 이뤄내는 기염을 토하게 된다. 산업의 규모답게 어렵게 출발한 한우자조금은 출범 첫해 43억 원의 자조금 조성을 시작으로 최근 300억 원 규모로 성장하면서 한우인들의 대정부·대국회 활동에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한우자조금은 쇠고기 유통감시단 출범시키면서 쇠고기 유통 투명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쇠고기유통감시단은 둔갑판매 근절을 위해 활동하고 있으며, 300회에 걸쳐 1,500개소의 감시활동을 벌이며 쇠고기 유통 사업 청정화에 기반을 닦아 나갔다. 소비자들에게 한우고기의 신뢰를 높이기 활동으로는 2006년 한우판매인증제 사업을 시작해 2012년 사업이 종료되기까지 전국 175개 한우전문식당의 인증을 획득한 기록도 있다.

한우 이미지를 높이기 위한 한우홍보대사 기용도 눈에 띈다. 국민 아버지 최불암, 국민 부부 최수종·하의라 부부, 국민 동생 이승기·송소희 국민 요리사 백종원, 최근 스토브리그로 상한가를 기록한 남궁민까지 굵직한 모델 기용으로 한우의 든든한 이미지 제고에 기여하고 있다.  이외에도 한우 농가 경쟁력 확보를 위한 교육프로그램 개발, 정책개발, 조사연구사업 등 각 분야에서 한우산업 발전을 위해 측면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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